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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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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순악 - 무라카면 묵고 자라카면 자고 뭐 여기 있으라카면 있는 기고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6-12-16 조회수 5992
첨부파일 첨부파일 김순악.pdf

연보
1928년 6월 10일(음력 4월 23일). 경북 경산군 남천면에서 삼남매 중 맏딸로 태어남
1944년 3월 취업사기를 통해 만주로 동원. 소개소 사람과 일본 순사가 인솔함
1944년 3-4월 중국 하얼빈과 치치하얼, 베이징을 거쳐 내몽고 장자커우 소재 위안소로 동원. 산골을 지나 허허벌판의 흙집들이 있는 곳 소재의 위안소에 배치
1945년 8월 이후. 전쟁이 끝난 후 하얼빈 역을 거쳐 베이징으로 가서 광복군의 도움으로 귀환. 중국 땅 어디쯤에서 기차가 멈춰서 한 달 동안 걸어서 평양으로 이동함
1946년 1월경. 서울 도착하여 서울역 근처 ‘색시집’에서 생활
1948년 이후 군산을 거쳐 여수에서 ‘요릿집’ 생활. 순경이었던 임모씨 사이에 임신
1950년 초 홀로 고향에 돌아와 첫 아들 출산
1952년 동두천에서 미군 상대 장사
1957년 미군과의 사이에 둘째 아들 임신, 출산. 이후 서울을 떠돌면서 식모살이, 장사 등을 하며 지냄
1997년 다시 고향인 경북 경산시 남천면으로 귀향
2000년 11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등록. 이후 증언 집회 참가
2005년 심리치료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원예치료 시작
2005년 12월 제1회 원예작품 전시회를 연 이후 수차례 작품 전시
2010년 1월 2일 서울 자택에서 사망
 
이동경로
경북 경산군 남천면 → 대구역 → 중국 빈장성 하얼빈 → 룽장성 치치하얼 → 화베이성 베이징 → 내몽고 장자커우 → 하얼빈 → 베이징 → 평양 → 서울
 
해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이 채록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여성 김순악의 구술이다. 2002년도에 발간된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료집』(여성부)에 수록된 내용이다. 정대협은 이때의 구술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2004년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 6: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팀, 여성과인권)을 발간하였다. 김순악의 구술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라는 제목으로 수록했다. 편집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이후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에서 김순악의 일대기를 책으로 냈다. 『역사의 증언4: 일본군‘위안부’ 김순악: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 (김선님 글,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펴냄, 일일사, 2008)이다. 본 해제의 연표는 세 가지 버전의 구술내용을 참작하여 다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해당 구술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김순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사람은 차혜영이다. 차혜영은 대구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의 일원으로서 김순악이 처음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던 2000년부터 김순악을 만나왔다. 증언집 제작을 위해 2002년에 본격적으로 김순악을 면담했다. 친분이 깊은 만큼 구술채록이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했는데, 김순악이 오래 알고 지낸 차혜영에게 과거사 말하기를 회피하여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얘기한 ‘위안부’ 피해내용과는 달리 해방 후 아버지가 다른 두 아들을 낳고 홀로 키우며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것을 유독 힘들어했다고 한다. 차혜영은 구술내용을 편집하면서 김순악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서 귀환 이후의 삶을 먼저 배치하고, ‘위안부’ 피해에 관한 내용을 뒤로 배치했다.1)
 
김순악은 1928년 경북 경산군 남천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삼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만 16 세 때인 1944년 8월 대구 제사공장에 취직하러 가는 줄 알고 따라갔다가 대구의 소개소를 거쳐 ‘위안부’로 동원되었다. 대구 제사공장에 다니는 또래 아이와 친구였는데, 그 집 할아버지가 소개하여 대구 소개소까지 따라갔다고 한다. 구술내용에 따르면 애초부터 그 할아버지가 본인과 부모를 속였다고 김순악이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대구 소개소부터는 소개소 사람과 일본 순사가 인솔하여 중국 하얼빈과 치치하얼, 베이징(北京, 북경)을 거쳐 1944년 4월 즈음 장자커우(張家口, 장가구) 지역으로 끌려갔다.
 
현재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에 속하는 장자커우는 1939년 9월 이후 1945년 8월 일본 패전까지는 몽강(蒙疆)연합자치정부의 수도였다. 몽강국은 만주국의 영향 아래 있던 일본의 괴뢰국이었으며, 베이징과 철도로 연결되어 있던 장자커우는 ‘(만리장성의) 문’이라는 뜻을 지닌 몽골어 칼간(kalgan)이라고도 불린다. 미군이 입수한 일본군의 암호문에 의하면 1945년 6월 장자커우 주둔 일본군은 ‘위안부’ 충원을 위하여 자신에게 할당된 자금을 달라고 조선총독부 재무국에 요청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그해 8월에 할당액 10배의 자금을 몽강은행을 통해 풀어주려고 한다고 답변한다.2) 패전 직전까지 장자커우 주둔 일본군은 ‘위안부’ 동원을 계획했고, 여기에 조선총독부가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것이다.
 
김순악이 열 댓 명과 함께 동원됐다고 말했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위안부’ 동원이 있었겠지만, 현재 정부 등록 피해자 238명 가운데 동원지가 장자커우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사람은 김순악이 유일하다. 이동 중 룽장성(龍江省, 용강성, 현재 헤이룽장성, 黑龍江省, 흑룡강성)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열흘 정도 하릴 없이 머물렀다고 했는데, 해당 지역의 일본군이 이동을 해버렸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후 김순악 등은 장자커우의 허허벌판 흙집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간판이 있는 집이었고 업자는 5,60세가량 된 조선인이었다. 매주 한번 성병 검사를 한 듯 보이고, 주말에는 군인들이 ‘바글바글’했다고 한다. 군인에게 군표를 받아 업자에게 건네주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짐을 싸서 나왔다고 한다. 하얼빈역을 거쳐 화베이성(華北省, 화북성) 베이징으로 나왔다는 구술을 보니, 해방 당시에는 장자커우가 아닌 만주 지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구술 중 김순악은 후퇴하는 군인을 따라서 여기 저기 이동했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베이징에서 광복군을 따라 기차를 타고 귀환하다가 중국 땅 어디쯤에서 내려 한 달 동안 걸어 평양으로 왔다고 한다.
 
해방 후 재 중국 한인들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감독 하에 중국 내에서 이동을 하고, 연합군총사령부의 감독 하에 귀환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5년 10월부터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하고 한인 교포들의 보호와 귀환을 도왔다. 베이징에 모였던 한인들은 1946년 1월 천진에서 배를 타고 2월 1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한인의 귀환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한인들은 중국 정보 철도국과 교섭하여 육로로 귀환하고자 시도하기도 하였다.3) 김순악 또한 임정과 중국정부와 연합군총사령부의 교섭이 순탄치 않게 전개되는 와중에서 베이징에 모였던 한인들을 따라 육로로 귀환하는 방법을 택했다.
 
김순악은 기차를 타고 오다가 기차가 끊기면 걸어서 평양까지 오고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왔다. 서울에서 김순악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돈을 벌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서울역 부근, 전북 군산, 전남 여수를 전전하면서 ‘색시집’와 ‘요릿집’에서 일을 했다. 임신한 몸으로 홀로 고향인 경남 경산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무뚝뚝하게 “신랑도 없이 지랄하고 자빠져가 왔다”고 말했다. 그래도 김순악이 다시 돈을 벌기 위해 아이를 두고 집을 떠났을 때, 3살 된 손자를 8살이 될 때까지 돌봐주었다. 아버지가 다른 두 아들을 홀로 키우며 생존해온 김순악의 해방 후 삶은 면담자인 차혜영의 지적처럼 “위안부 경험보다 더 아픈 상처”처럼 보이기도 했다.4) 
김순악은 우울증과 홧병으로 술과 담배, 다툼으로 점철된 일상을 지내오다 대구의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을 만나고 2000년 11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생활지원 대상자로 결정되면서 삶의 전기를 맞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피해자임을 이해하는 정부와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에 비로소 삶의 위로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방에 걸어 두고 ‘보고 또 보았다’고 한다. 김순악에게 그것은 “나라에서 나를 ‘위안부’ 피해자라고 인정해준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 해준 것이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5)
 
심리치료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2005년부터 원예치료를 시작한 김순악은 이후 압화 작품 작가로서 몇 차례 전시회를 하기도 했다. 압화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김순악의 표정은 평화로워 보인다. 대장암 수술 후 자택에서 회복하던 중 2010년 1월 2일 사망하였다. 유언으로 전 재산 1억 원 중 반은 대구지역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건립기금으로, 나머지 반은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으로 사용하라고 남겼다.6) 이것이 종잣돈이 되고 시민들의 기부금을 모아 2015년 12월 5일 대구 중구 서문로에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개관하였다.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박정애)
 

 
증언
 
내 나고는 선물 받고 하는[게] 제일 원이라 안 카더나? 꽃 한 송이를 안 받아 봤다. … 내가 본대 꽃을 좀 좋아하는데도 안 받아 봤어. … 꽃 받은 사람은 얼매나 좋겠노. 생화[는] … 그렇게 곱게 있다가 말이야. 한 일주일씩 가면은 … 시크머이 시들어 지는거 보이, 아이구 우야꼬 싶어 가지고는 뵈기 싫어. 그래서 인자 이거를(조화 꽃) 사다 [놓았지], 인제 평생 봐도 되고. [더러워지면] 말간 물에 탁 해 가지고 [물은] 뿌리 뿌고 저래 꼽아놓으면 금방 살았는 거 매로 [있어].
 
의심증
병원도 병을 진찰하면 아는가봐, 마음을 진정하라 카매.
 
내 그마이- 안 살라고, 다 버리고 다-- 버릴라하고 옛날 꺼. … 우리 동생 술 먹고 죽는 거보이 인자 술 먹고 죽어야지 하고는 … 난 더 먹고 죽을라고 막- 소주 먹었다. 소주 댓 병으로. 그라다보이께네이 훈이할매가 떡 들어오는데7) 가슴을 치겠더라꼬. … 어데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겠노? 어떻게 해야 되겠노. … 인자 텔레비전 보면 아- 저런 사람도 다 사는데 나는 누가 들봐다 보겠노. … 이 눈눈눈 하러 병원에 가이께네8) 보호자 데리러 오라카는데 … 천지에 데리고 갈 사람이 없어. 그래가지고 삼 만원 주고 여그(여기) 아는 사람 데리고 갔다커이.
 
병원도 병을 진찰하면 아는가봐, 마음을 진정하라[고] 카매. 하! 맞다. 병원이 안다 시핀기(싶은 것이). 만날 날 잡으러 오는 [것 같고] 여여 받치도(부딪혀도) 깜짝 깜짝 놀래고 … 그런 병이 한없이 들어앉았다 이 말이야. 우울증에다 뭐, 의심증 아 있나? 사람이고 뭐고 뭐 의심하는 거. … [물건을] 이렇게 끝퉁이에다가 놨두기로 하면 … 반듯이 해놔야 내 맘이 좀 낫지. 하지 못해 양말 같은 거도 한 켤이 벗어 놓으면 그걸 빨아 뿌리야 마음이 [놓여].
 
마음이 막 그리 급하고, 짜증만 나고, 내 혼자 자꾸 그런 마음을 억씨 오래 가졌다고, 내 속으로 욕하면서 에이 XX 가서 술이나 한잔 먹어야겠다 이라면 또 인자 술 꼴딱 구신 되다시피 해야 들어와야 된다. 그래야 잠자고 … 배고픈 줄도 모르고 술만 먹으면 그저 에헤-하고 … 그만한 병을 내가 가지고 있었다.

아가씨나 머심애나 얼래나 … 사람을 안 만나고 싶다카이께네. 사람을 만내서 이런 얘기도 하고 이래[야 되는데] 어디 통한 데가 없으끼네이. 내가 이야기해가 ‘어이구 그랬구나, 참 애 묵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 인자 마이 좋아졌어. 술 안 먹고는 이런 말을 주끼진(이야기) 안해.
 
유곽
나는 베린 몸띠기 때문에 처녀가 아이고.
 
남자들캉 한번 자도 버린다 카는데 수십 명씩을 그렇게 했는데, 내 몸이 온당하나 나는 인자 아주 베리닌 기지(버린 거지). … 애초에 돈 벌러 나가 가지고 엉뚠데 [가서] 이래 됐으끼네이, 잘 못 살았는거 아이가?
 
내가 [해방 후] 동짓달인가 섣달인가 … 서울 넘어 와 가지고 … 생전에 안 와본 서울을 어떻게 어두로 찾아 가겠노, 아는 데를 찾아가겠나 어델 찾아 가겠노. … [내가] 덜덜덜 떨고 있으이 어떤 지게꾼이 ‘누구 기다리고 있는가’ 이래, 불쌍한가 밥 사준다고, 어떤 밥집에[서] 사주더라 카이께네. … 그래 나를 밥 먹는 데로 보내달라고 캐노이께네 어떤 큰 식당 집에 보내줘가 … 식당에서 일하다가.
 
식당 같은데 일하면 밥이나 얻어 묵고 잠잤다 뿐이지 돈주는 거는 없거든. … 다 큰 가시내가 그런데 있지 말고 차라리 돈 벌라면 몸 띠 파는 색시들도 있고 이래이께네, 그런대로 벌어. … 그래 몸띠 파는데 댕기 가가지고 몸띠도 팔고 그라이께네 돈이 퍼뜩 퍼뜩 [모이대]. 옷도 빤듯히 해 입고 인자, 그런데로 인자 깨달았지 … 그래가지고 [고향에] 몇 해로 안 왔지 뭐.
 
인제 이왕 이 까정 왔으께이 돈만 거머쥐면 인자 간다. 애들하고9) 엄마하고 지지리 뭐 못 살고 있는데 … 그땐 돈만 벌이만 인자 일년이고 이년이고 나는 돈만 벌이면 집에 간다 인자 그거만 생각했지. … 돈 따매로 내가 이렇게 나갔더랬는데. 목숨만 살아왔는 것도 부모님은 [좋아]할낀 데도.
 
그런 유곽 찾는 것도 나는 … 베린 몸 띠기 때문에 처녀가 아이고, 생 가시네가 아이란 말이야. 돈 벌라 카믄 저런데 가야되는구나 하고 … 소개소로 물어물어 찾아서 그런데로 갔다고.10) 한국여자도 유곽에 많고. 아주- 고운 거만 뽑아. 날씬하고 이쁘고, 나는 옷을 해 입혀 놔노이께네이 기가 차는[거야]. 이쁘겠지 뭐 그때. … 그때는 내[가] 육공 말을 했다, 여섯 나라 말을. … 담배라 카는 말도 알고, 한마디 들으면 다 아는가봐. 담배는 쎄가래고, 오케이 하는 거. 재떨이는 에스제이.
 
돈 더 잘 벌일라고 퍼뜩 벌려고 인자 전라도로 가가 지고 인자 … 군산 갔다. 군산 가가 지고 [그 전보다] 또 좋은 집에 들어 가가 지고 또 이래 손님 받고 돈벌이고. 또 그래가 여수에 갔다.
“스물 하나, 둘 때 인자 여수 가가 지고 인자 지금 겉으면 뭐라카노? … 몸띠 안 팔고 술만 파는 집에 들어갔다. … 요리집. 손님 인제 꽉 오면 인제 [술]상 크게 차리 놓고 [하는데] … 그런데 가가 지고 술 마시고, 그때부터 술 마셨다 이 말이야. 술 따라주고 술값도 계산하고 손님 오면 알래(안내)하고, 그럼 도꾸이(단골) 손님들이 한패 썩 안 오나? … 그때부터 인제 몸띠 파는 거는 또 싹 끊고. 요리 집에 있을 직에는 [사람들이] 무진장 많이 [나를] 찾지. 좋다고. 잘 주끼지(말하지), 술 잘 먹지, 끼고 놀기는 마 희한했다 참말 아인게 아이라.
 
임 순경
이제 한국사람 정이 쪼매 들었다.
 
[단골손님 중에] 어떤 순사가 나를 착하게 잘 봤던 동 … 자기 쉴 참에 한번 썩 와 가지고 … 이 얘기도 하고 그라더라. 그래서 이제 한국사람 정이 쪼매 들었다. 애인매로 그래 알고 댕깄는데 … 그래 거 있는 친구들도, 다 ‘너거 애인이다’ 캐싸믄서, ‘임 순경 왔다’ 이케샀고 그래 꼭 나를 불러주면 인자 독상 안주나 뭐. … 그래 우째 친해 가지고 함 그래 잤던가봐. 그것도 뭐 잤는거는 알지마는 애가 [들어 선지] 석 달 됐는지, 몇 달 됐는지 그거는 [모리고].
 
인제 맨스가 없이끼네, 그래 친구들캉 앉아 가지고 ‘아이고 야 (소근거리듯이 가는 목소리로) 니 순사하고 잤구나’ 이래. ‘그래 잤다’ 이러이끼네, 친구가 인제 누구 딴 순경한테 물어 보이께네 [임 순경이] 어데 갔다 그래. … 얼래나 하나 배가지고는 내 혼자만 돈 좀 벌어가 [고향] 가자 카는 도중인데, … 여수반란사건이 났어. 그러이께네이 내가 여기 있다가는 안되겠다 [싶어서] 애 배가지고 [고향에] 내려왔다고. 이 사람(임 순경) 통 안 보이는데 어떡해. 애는 뱄는데. 스물 둘에 애를 뱄는기다 인자 말하자면. 한 이년 꺼정도 그 사람[하고] 안 친했제, 한 일년도 안 친했겠다.
 
애 배기 전에 [고향에] 편지 연락 하이 아부지가 돌아가셨다 그러[더라]. [아버지는] 나무 짐을 댕기고 하이께네이 대구 있으면 나를 찾아 볼라고 캤는데 … 엄마가 그카는데 ‘너 찾을라고 너거 아바이가 몇 번 찾아 보이께네 못 찾고, 누가 이야기 들었다[고] 카는데 서울로 갔다 카더라 너거 아바이가 그카더라’ 이카대. 우리 아부지가 해방 되가 … 내가 집에 오기 전에, 천날만날 나 따문에 병이 들어 가지고 … 논둑에 앉아 가지고 ‘해나 우리 순악이 오는가 싶어가’ 그래 기다리다 기다리다 내 여기(고향집에) 오기 전에 (울먹이며) 일주일전에 돌아가셨지.
 
첫 범 편지에다 취직했다 카고 돈 벌으는 중이라 카면서 [보내니] [엄마가] 살았으이 다행이다 카고 … 아부지가 그래 너만 기다리다 죽었다고 카는데, [아부지] 죽고 나서 갈라커이 오지 말라고 캐가, 자꾸 자꾸 [편지] 연락만 됐지.

그렇게 임신 해 가지고 [고향에 가니] ‘신랑도 없이 지랄하고 자빠져가 왔다’고 우리 엄마가 내매로 이래 [무]뚝뚝하거든 그래노이. [내가] ‘신랑이 인자 오겠지 뭐. 아이(아직) 소식 없이께 우야는고’ 그랬다. 여게 [고향에] 와 가지고, [아이를] 낳아 가지고 한 삼 년 넘게 있었지. 엄마가 있고 하이께네 ‘내 가가지고 어데 돈 벌데도 있고, 내 전에 아는 사람도 어데가 있는지 함 찾아보고 그란다’고 [동두천으로] 올라갔지. 내가 객제(객지)를 댕기다가 보이께네 … 어데다 [아이를] 둘 데가 있나 그래. 친정밖에 더 두나?
 
장사
양키 물건 장사도 하고, 양키 색시 장사도 하고.
 
박대통령 할 때 양키 물건 장사도 하고 양키 색시 장사도 하고 [그 전에] 내- 하던 거 우리 배웠는기 그거뿐이라 참말로 배운 것이. 애들 믹이 살리고 공부를 시키야 안되나. 애 여덟 살 때 [고향에서 동두천으로] 내가 데리고 올라 갔댔다. 그래가지고는 양키 물건장사 하민서 동대문 시장에 딸러 장사[도 하고] 인자 물건 사러 나한테 온다, 나는 양색시들한테 딸러를 받까 가지고 준다, 주면 또 양색시는 저거 미국놈 아는 놈한테로 준다.
 
그런데 인자 자꾸 하다 보이까네 양놈들[과] 같이 술도 묵고 이 얘기하고 … 내가 스물다섯, 여섯, 뭐 삼십 다 되가는데 막 ‘마마상11)하고 오면은 밥도 막 떠 믹이주고, 색시들하고 한테 어울리가지고 놀고 이라믄 또, 미국사람하고 내가 친하다고. [미군부대에] 들어가가지고는, 거도 패수(출입증)가 있어야 들어가는데, … 아는 사람이 보초 누가 선다 하므는 그래 내가 ‘드가이끼네 니 나 좀 봐도고’ 하이께, [보초를 선 미군이] ‘아, 오케이, 오케이 마마상 마- 좋다고 말이라. 그래가 인자 들어갔다.
 
오바 이거, 추블직엔 오바 통에다가 접시 겉은 것도 하나 썩 집어 여가 [온다].12)
 
나는 [양키] 색시장사 해 가주고 돈 마이 못 벌었어. 내 집이 없이끼네 방을 얻어줘야 될 것 아이가? … 한집에 싹 얻을 수가 없으께, 여게 저게 얻지. 애하고 내하고 사는 방 있지. 나는 방세도 반반 썩 했어. 그래 돈을 똑같이 갈라뿌이. … 이원을 벌이머는 내가 [양색시들] 일원 줘뿌고 이러이끼네 돈을 마이 못 벌이겠어. 가시내들도 실컷 배워 가지고는 저거 맘대로 살림을 나가뿐단 말이야. … 독방 얻어 가지고 지 맘대로 하겠다 하는 거 어데(어떻게) 뿌잡노. 서울 저저 장사꾼한테 말해가지고 끄자다가(끄집어다가) 신분 올찮고 인맥이 없다 카고 뭐 어짜고 하는 거 … 데리다가 인자 실컷 가리키 놓으만 저거 맘대로 간다 카이. 내가 본대 [돈이] 없어 글치 인심은 내보다 못한 사람을 자꾸 도와주고 싶지 까래비고(할퀴고) 막 이렇게 그렇게 하기는 싫다 이 말이야 내 말은.
 
한 서이 너이 고래 델고 있지 뭐. … 그라민서 미국 [달러] 장사를 내가 시작해. 그래도 그 장사를 하이께 내가 유지를 어예 [했지], [아들을] 학교 보내고 밥 먹고 그라지, 안 그라면 색시장사[만] 하면 저거(양색시들) 아가리에 집어였는기나 한가지라. … 내가 젊으만 내가 하는기 낫겠다 하는 그 생각 밖우 안 들어. 이왕 나는 [몸을] 버맀는긴데 자슥 따메 못 하끼네 그렇지.
 
[둘째 아들은] 그때 낳았지.13) 그때 내 처음 … 색시장사 안하고 양키물건 장사할 때. 그때도 [둘째 아들] 그거 마이[낳고] 해도 고아원 겉은데 가고 그랬지. 우리 애도 고아원에 줬다가 가지 않아 가지고, 그래 할 수 없이 밥 좀 믹이서 키왔는거지, 그저 그랬는기고. 동두천, 의정부 거서 … 한 십 년 넘게 살았다카이끼네. [큰아들이] 한 중학교 이 학년에 [동두천에서] 나와 가지고 서울에 방 얻어 가지고 살았지. 식모14)로 갔으끼네이, 럭키그룹 부잣집에서 … 일 년 반 밖에 안 있었고, 저어-게 한 집에 가가 지고는 칠, 팔 년 있다가. [식모살이는] 십 오 년 넘게 하고 냉민(냉면) 가게도 다 해보고 … 애들 공부시키고 할직에.
 
이름
순옥인데 어릴 적에 그래 불렸는데.
 
[내 이름이] 순옥인데 어릴 적에 그래 불렸는데 아버지가 글을 모르고 무식해가 그랬든지 … 한국사람을 갔다가 일본 성으로 갈리면서(바뀌면서) 내 이름 문자가 그리 됐부렀는 모르겠는기라. 출생신고를 늦게 하게 땀에로, [남]동생 놓고 [출생신고] 하러 갈 때는 벌써 내가 나이가 뭐 한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그래 무다 카던데. … 우리나라 뭐꼬, 주민등록인가 도민증인가 나올 때 보이니께 그래 김순악 ‘악’자가 되가지고 있대.
장녀. 밑에 남동생 둘. … 내 밑에 바로 동생은 잃었붓다. 한 오십대[에]. 고마 죽었다카이. 하도 줄줄이 못사니까네 술에 그래서 죽었어. 동생 하나는 또 부산에서 산다고 사는데 저것도 그럭저럭 사는 것 같고.
아부지가 넘의 농사 머슴매로 당기기 때매로, 말하자면 넘의 농사 젓고, 그래 인자 뭐 밭 때기 인자 돌밭, 돌 있는 그런데 [지었어].
[나락농사] 쪼맨한 농사도 짓는데 그런데 밥 해묵고 [나는] 말갱이매로(말처럼) 나물이나 뜯고 소도 믹이고 뭐 이런 산골에선 그래 다 살았지이.
지대로 살았는 집 같으면 가시네들을 어데 오라 칸다고 내보내고 공장 보낼 가시네들이 어데 있노?
 
야마다 공장
공장에 실 푸러 간다고 간 것이.
 
내가 잊어뿌지는 안 하거든 음, 저게 야마다 공장에 실 푸러 간다고 간 것이 몸띠만 베리고 이렇케 고생만 하고.
야마다 공장이라고 있었어. 대구에 야마다 공장 그것밖에 모리거든.
누 집 할아버지[댁의] 손년가 손준가, 누비(누에) 공친하는(키우는) 실 푸는 [야마다] 공장 댕겼됐다고. [그 집] 기집애하고 만날 같이 놀고 뭐 이라고 하이께네 친한 줄 알고 인자, 그 집 할아버지가 ‘그 공장에 인자 가게 되었다’고 카고. 그래가 나는 … 우리 동네15)에서 나 혼자 나오는 기라. 면에 오니까 또 몇이 있더라고, 그래 인자 대구로 들어가니께네 공장[에 간다고] 모집해다 놨는것도 억시 많대. 사람이 한 여남은(십여)명 되드라고. … 내가 나갈 직에는 옷도 지대로 몬 입고 부잣집에 치운다고는 캐쌌제 … [처녀들] 잡아 갈끼라고 카민서 모두 그래 캐싸이끼네 공장이라도 가뿐기(가는 게) 낫다. 공장 댕기던 사람도 봤고 인자 마음이 들뜬기지. 공장 보내준다고 가기는 갔지.
내가 그때 열 여섯 살이지. [모인 여자들이] 다 고 또래들이지 뭐. 엄마가 [봄에] … 요마끔한 상추 씻어 가지고 집에서 점숨 먹고 나오는데, 아부지가 점심 사주고 뭐 이랄쑤도 없어노이께네 그래 엄마가 마-- 울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울먹이며) 막 손잡고 막 울고.
아부지는 ‘저저 할아버지가 좋은 [곳에 취직시켜주는데, 왜 우냐면서]’, 고함을 꽥지르고, 전에 부텀 우리 아부지는 나를 부잣집에 치운다캐싸코, 우리 엄마는 [고생한다고] 일하는데 안 보낼려고 [했고]. 그런 생각을 하이께네 어무이 손을 놀 때 생각이[나]. 그게 눈에 선하거든.
우리 아부지는 공장에 넣는 줄 알고 … 무식 하이께네 아무것도 모린단 말이야. 지금 내가 생각커이 전에도 자꾸 생각해보이 그 할아버지는 옛날에 양반들 기생집에 댕겼나 싶어.
기생을 인자 모으는 매로 지금으를 생각허면 소개소로 해 가지고 그케(그렇게) 사방 군데서 여자애들 모으는 소개소가 있는가봐.
 
그리 점숨 묵고 나와 가지고 … 남천면에서 생전에 안 타본 기차를 … 대구 꺼정 타고 나왔지. 생전 처음 탔지. 그 할아버지가 대구꺼정 나를 데려다줬지.
대구 소개소에 모아 가지고 … 몇 일 있었는동 그건 모리겠는데, 또 그래가지고 기차 타러 모두 우- 나갔는데 기차 타고 또 서울 갔다, 또 서울로 인자 팔러 가는가봐. … 그래 서울서 모닸는데(모았는데) 한 이십 명, 삼십 명 모치가(모여가) 있는데, [여자들] 어데로 갔다 카고. 우리는 나이가 어린께네 허가가 안 난다 캐사미서 … 그렇게 그렇게 끌고 갔지, 그렇게 갔지.
[나를] 소개소로 갔다 줘 가지고 서울서 색시 가지러 온 사람들 생[색시] 사러 온 사람들이, 그 사람이 또 돈주고 우리를 사 가지고 가는 기라 말하자면. … 그래서 서울서 우리가 몇 일 있으끼네이 우리가 안 팔리 나가이, 워낙 시골뜨기다 캐노이께네이 안 팔리 나가는 거, 옷도 우린 워낙 남루하게 입어 놓으께네이 그 소개소서 옷 해 입히고 업자가 돈을 더 비싸게 받는 기라 우리를 갖다가 … 그리 팔아 무졌는거(버려 졌는거) 같애. 어디로 데리고 왔는지 어데로 데리고 갈 란지 다 모리는 거지.
 
위안부
가보니 군인, 군인 상대하는 데라.
 
위안부라고 그 주인들[이] 다 위안부[라고 부르대].
옷 참하게 입히 가지고 팔리 나가게끔 일본에도 보내고 하루삔도 보내고 그래 인제 어두루 보내고 남았는거는 서울시내 팔리 나가는 거는 또 팔리 나가고 … 한 이십 명되었다. 그때 우리 갈 직에도. 어디로 간다 카는 거 우리가 아무 꺼도 모리는 거이야.
저거(소개소 업자들) 돈 벌기 좋은 데는 그렇케 팔아 묵는 갑다 이말[이지]. 그이 우리는 모리고 인자 그래가 따라 갔는기다 이 말이야. 가보니 군인, 군인 상대하는 데라.
 
우리는 [전쟁] 끝날 때쯤 갔는기라. 우리들을 끄짓고 댕기다가 [여자들은] 전부 없어졌고 또 딴데 여자들 또 사모라가지고(사 모아 가지고) 또 많고. … 한 일년, 왜 돌아 댕겼나 하믄은, 군인이 철수를 하기 따매로 … 군인이 없어 가지고 또 딴 데로 가고 또 딴 데로 가고, [일본 군인들이] 자꾸 후퇴를 해가지고는 그래됐다. 결국에는 우리가 인자 몸 띠 팔게 되고 … 빚 졌는거 건질라커이께네 팔려 갔는기고 … 구박이 얼매나 많았는데, 그 [인솔한] 사람들이 우리를 밥도 지대로 안 사주고 데리고 댕겼다고. 소개소 주인이. 한 일곱, 여덟 명 될 끼다. 우리 갔는 거.
 
우리 저-어 몽고16) 어데 까지 갔다 카면 말 다했지. 여름을 몽고에서 지내다가, 몇 달 지냈는가 그건 모르겠어. 거 계속 있었는게 아니라, 거서도 인자 헤매다가 우리가 그냥 밥 묵고 헤매고 군인들 없어가지고 그냥 헤매고.
그러니께이 여름을 지나 또 가을 들다말다 할 적에 인제 또 북경으로 왔단 말이야. … 북경을 갔는가봐, 북경 안의 시내.
 
장가고17)라 하더라. … 그기 중국말인지 일본말인지 그런기는 모리는데, 골짜기 들어갔는데 그런데를 지어놓고 일본사람들도 살고 중국사람 동넨가 봐. 인제 집을 자꾸 자꾸 지어 나가는데 우리는 지어놨는데 들어갔고.
전부 흙이지. 산골에다가 아무데나 빈터에다 … 갑자기 지었는 집들인데. 다다미 두 장 까는 거 매로 작지. 요 하나 이불 하나 (여름이불을 가리키며) 요래 얇은 거 하나 깔고 자는 기라. 딱 여겨만치[한]18) 방이라 … 혼자 자게끔 해놨지. 침대 만치 높아 방이. 복도에 조개탄 불을 넣어, 이 비루박(벽)도 흙벽돌로 가지고 단곙(단계) 해서 지은 거기 따매로 춥지는 안해.19)
색시 집이라 써놓으끼네 그리 다 들어오는 기라. … 간판이 달려가 있지. 그래 거서 인제 군인들 받았지 뭐.
그런 집이 또 어데가 몇 개가 있는지 모르지만, 요요요 마실에는 우리 집 고 하나고 또또 저 우에 동네 좀 나가면 … 몇 개가 있는지도 모리지. 산밑에 가면 또 그런 집들이 있는가 [그래].
 
한국 사람이 맡아가 장사하는 기다 그기. [위안소 주인은] 한 오십, 육십 넘었지. 주인네가 다 해주고 관리하고 돈벌이는 [우리가 하는] 기라 말하자면. … 주인이 내외간이면 내외간이고 형제간이면 형제간이고 그렇지 뭐. … 저거 식구들 먹고 돈벌이는 거지 뭐.
 
고기 잡기
십분 걸리는지, 이십 분 걸리는지, 그것도 몰라. 눈 질끈 감고.
 
일요일날은 마- 바글바글하이 … 나라비(나란히 줄을 지어)로 서 가지고 들어오는 거지 뭐. 내 하나에다가 군인들이 나라비로 서가 있으면, 화장실에 갈라면 우리서가 있는 거 있지? … 하네(한사람) 앞에 그렇게 배치가 된다 이 말이야. … 하루 일요일, 토요일 같은 날은 삼십 명 썩, 사십 명 썩 사람을 상대한단 말이라 군인을. 그저 뭐 십분, 오분, 뭐 이런데, 내우간에 자는 거매로 그래 옷을 벗나. (허리춤을 풀어헤치며) 여게만 열면 되는 긴데.
십분 걸리는지 이십 분 걸리는지 그것도 몰라. 눈 질끈 감고 (두 눈을 감으며) 막막 고기 잡는데, 고기 벌, 빌리놨는거 한가지로라 우리는. (라이터를 가지고 손으로 비벼대면서)20) 그러이 보통 날은 뜨문뜨문 있고, 한 대여섯도 받고 뭐 한 여남은도 받고. 토요일, 일요일에 삼십 명, 사십 명씩 받고, 요령 있고 빨리 빨리 잘 받는 사람은 오십 명씩, 마 육십 명씩이래 받는단다.
나는 그렇게 못 받는데, 나는 한 삼십 명 정도 받았지 싶어. 그 패(군표) 받아 났는 거 가지고 안다카이께네.
 
아침 아홉 시쯤 시작해 손님 받으만은 지녁 여섯 시까지 받나? 그래 받고 또 인자 [저녁] 일곱 시, 여덟 시부터는 장교들이 나와 장교들이. … 그런 것들이 나와 가지곤 사람을 딱 골라 가지고 도꾸이(단골)가 있이므는, 지가 댕깄는 그 색시 찾아서 그 방으로 들어가고 … 우리는 뭐 손님 없으믄 손님 없는 대로 밤에 자고.
군대서 외출 나올 직에 너는 몇 시간, 너는 몇 시간 [정해져 있고], 장교는 장교대로 나오고 쫄병은 아침부터 나오고, [군대에서] 싸인 짝짝 해가 나오는 대로 나와야되고. 일찍 나오는 거는 일찍 드가야 되고. … 휴가 나와서 할 짓 없어 자고 가고 이런 것도 없어. 시간이 없지.
[위안소] 대문에서 들어와 가지고 인제 … 극장에 표 팔듯이 그래 팔므는 [표 값으로] 돈 주므는 고게서 [위안소 주인이] 도장 ‘탕’ 났는 종이 XXX … 그 사람한테 지키줘(집어줘). 그 사람 지키줄 때 뭐 지키주는가 하므는 그거를 지키준다고. 그 있단 말이라 끼우는. 삿쿠. 후- (한숨을 내쉬며) 그거하고 그 패(군표)하고 그렇게 들라 줘. 그거를 인자 군인한테 지켜주만 그 군인이 줄서가 있지. … 그래 우리가 잠깐 손님 하나 받고 둘 받고, 인자 잘못되믄(삿쿠가 터지면) 빨리 인자 나가서 씻는 데가 있어.
뒷물하는 데가 있단 말이야. … 거서 인제 퍼뜩 센죠(뒷물)하고 들어오고, 그랄따나(그럴동안) 문이 환하게 열리 가지고 있이마는 한 놈 벌써 와가, 들어와 가지고는 문 열어 놓고도 사람이 없으께네 옷 (허리춤을 가리키며) 이거 대강 인제 끌르고 있는 것도 있고, … 또 하도 바쁠직에는 그냥 [뒷물하러] 안 가고, 말하자믄 [삿쿠] 그기 안 터지면 안가는기고 터지므는 찝찌버서 우리가 못 한단 말이야.
[뒷물하러 가면] 손님 안 받고 어데 갔는고 고함을 지르고 생-지랄을 하는 거지. 거 인제 관리하는 사람이.
[일본군인들] 단도 찼지 총알 같은 거 찼지 뭐 이래노이께네, 단도를 다 끌려지지(풀어지지) 않으노이께네 마 [우리는] 옆구리도 베기지 배도 베기지 온 전신이 가슴백이도(가슴팍에도) 베기지 명찰 뭐 이런 거 베기고.
 
나는 내- [병] 안 걸리고 만날 군인을 받는 거나 한가지라 말하자믄은. 빙 걸린는거는 주사 맞고 일주일로 또 주사 맞으러 댕기고 손님 받지 마라 그래. 밥만 먹고 노이께네(노니까) [위안소] 주인네가 … 덜 좋아하고 막 그라지.
또 어떤 거는 얼라 배가지고 얼래 치이며는(낙태시키면) 며칠 씩 있고, 빙원에서 안 나오면 ‘검진 떨어졌단다(받아야 된다고)’ 이라고, 난 안 떨어졌으께 [군인] 받는 기고.
“막 찢어지고 따갑고 가서 뒷물하믄 영- 따가바서마 못 살고 이랬지. 그래 아프다카믄 소독약 그거 하라 카고, 검진할 때 가서 또 약 바리고 피 빼 가지고, 또 주사하므는 [검진] 안 떨어진께네 그래 내 했는거지(군인 받았던 거지).
 
장부정리
이런 통이 있어, [] 담기키가. 몇 사람을 상대 핸 거를 알지.
 
일본식. 사다꼬라 [이름] 졌다가, 데리꼬라고 부리던지 뭐 부리고(부르고). … [데리꼬는] 소나무 송자에 대죽 자더라.
아침저녁에 좀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좀 씻고 뭐. 밥 해주는 사람이 있지. 점숨 먹을 여거가(여가가) 어디있노? 소금에다 주먹밥 해 가지고는 … 도재이(도자기) 그릇 같은 넙떡 한데 서너 개 담아 가지고 들라준다. 유치장에 들라 묵은 거 매로.
 
[군인들이 갖고 오는 표를 갖고 있다가] 간수를 하는 거지. (주위에 있던 작은 통을 들면서) 이런 통이 있어, 여[기] 담기키가. [그래야] 몇 사람을 상대 핸 거를 알지. … 내가 그거를 인자 사무실에 가져 가므는 시아려 봐야 자기들이 [장부에] 적지.
그라고 인제 참 뭣도 모리는거는 … 거 터져 가지고도 안 씻고 그냥 돈만 많이 벌이만 좋은가 싶어 가지고. 돈벌이만 우리가 만지나 뭐. 돈주나 뭐.
옷이 없으면 … 사 입는다고 하는 거를 [주인이] 고래 돈을 주면 옷을 사 입어. 한 벌 가지고 뭐뭐 입나? 일본 옷을 산단 말이야. 싸구려 같은 거 그런 거를.
우리가 얼마씩 시겠다(쓰겠다) 달라카믄 [주인이] 얼매 주고 그냥 마음대로 주지를 안해. … 우리 지금 겉으면 만원을 달라 카든지 이 만원을 달라 카든지 [하면] 그래 주는 기고, ‘그래 니가 얼매 썼다' 하는 거 그것만 있지. 돈 하나도 받아보지를 못했는데도 한번 썩 계산해. 한 달에 한번 썩. 너는 얼매 벌었니 니 얼매 썼다 하는 그런 거[만] 이야기 해주고.
 
친한 사람이 없지. … 지금도 넘한테 얼굴도 지대로 못 들고 댕기고, 술로가 살았는데 그때도 낯선 여자들캉 만내키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그러이께네 그때는 수심도 가득하고 … 그 사람들이 하자하는 대로 가야되고 무라카면 묵고 자라 카면 자고 뭐 여기 있으라카면 있는 기고 아무것도 그때 이야기를 잘 모리겠어. 딴 이야기 뭐뭐뭐뭐 할 이야기가 있노.
아이구 답답해라 나는 이렇게 됐구나 싶은 생각부터 먼저 나던데 뭐.
가시네들 크면 시집가는데 이기 그긴 갑다 싶으고 뭐. 열 일곱, 열 여덟 된께 인제 또 경도(생리)도 있고 이렇던데.
열 여섯 살에 갔으끼네 … 누가 하는 것도 알고 뭐 이라는데, 뭐 기분이 어떤지 뭣이 어떤지 우리는 그런 거 몰랐단 이 말이야. 남자, 여자 상대가 어떤가 그거는 몰라, 시집가야 인제 남자캉 여자캉 그래 사는갑다 하는 거만 알지.
 
해방
한창 주인네도 재미볼라하는 통에 해방이 됐단 말이다.
 
산골에 가가 자리잡아가 한창 주인네도 재미볼라하는 통에 해방이 됐단 말이다. 해방됐다는 소릴 아침에 듣는데 우린 나오는 기다. … 듣고는 그질로 막 보따리 싸가지고.
우리가 갈 때는 하루삔 걸쳐 가지고 몽고로 갔는데. 또 나올 직에도 하루삔 역 걸쳐 가지고 기차를 타고 인자 북경까지 다 나가는 기지. 피난민으로 인제 쫓기서. … 우리가 나오는 기차에 막 짐짝같이 짐차에 실리가지고 나오는데.
몇 날 몇 일로 그래 나왔는데 … 북경에서 독립군이라 하는 나이 한 사십, 오십, 육십 이래된 사람들이 태극기를 인자 극장 겉은 그런 광장에다가 [걸어놓고] 몇 천명인지 몇 백 명인지 바글바글하는데 우리를 모아놓고 사람을 골르드라카이께네이 … 중국사람, 한국사람.
그래 사람을 갈라 가지고는 우리 독립군들이 한국 우리들만 인솔해가지고 … 북경 천진 배타고 간다 카는 데를 알아 보이께네 배가 끊어졌다, … 맥히서 못 타고 간다고 인제.
기차를 타고 어데꺼증 왔는지 것도 몰라 내가. 중국의 어느 땅까지 왔는지 그것도 모리겠는데, 기차도 못 가고 인자 사람[도] 못 가, 핑양(평양) 갈라카믄 아이 차리(차례) 멀었는데. 압록강도 건너야지 아이 따나(아직까지) 중국 땅에서 헤맨단 말이야.
중국 땅에서 밤낮 없이 걸었어 … 8월 15일이께 구월 한 달로 걸어, 걸어서 잠자가 헛간 겉은 데 잠자므는 또 밥을 주는데 보이 … 빗자리 하는 수수, 그거를 삶았는데, 삶아 가지고 물에다가 특특 갈아 주더라고. 막 배가 고파 못 젼디는데(견디는데), 그거를 꾹꾹 씹어. 물이 입으로 넘어가지를 않고 … 다 그렇게 살았다고 참말로. 살아서 한국에 나올라고.
 
나는 거-- 이듬해 나왔거든. 농사졌는 집에 그런데서 근 일년을 이북에 살았는기지, 이북에 살았어. … 해방되고 근 일년 반, 이년이나 되가지고 여기에 한국에 도착했는 기지.
해방되이께네 나라가 꺼꾸러 되었는지 어에 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리는데 … 우쨌거나 웃었는동 사람 죽는 것도 모리고, 와 이카노 싶은 게 말이야. 그런 총탄 속에서도 안 죽고 이래 살았는 … 그런 생각을 하면 우째 살았는가 싶은고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한국 사람 숭
우리 애한테 말을 해야되나, 우찌 해야되나.
 
우리 애한테 말을 해야되나 우찌 해야되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 왜냐면 이기 자랑이 아니고 우리 한국사람은 숭이란 말이다.
우쨌든간 내 양심으로써는 버맀는거지. 배린 몸이라 이 말이야. 시집을 가도 좋은 소리 못듣고.
내 몸 띠 이런 것이 어데로 가고, 인지 내가 어떤 놈을 만내 가지고.
밑으로 그래 가지고는 [시집간] 색시로 보지 처녀[가 아니]라고 누가 안 데려 갈끼라 이 말이야. 그런 천대를 어찌 받겠노. 이 세월이 자꾸 자꾸 이래 좋아지는데. 나도 사는 것이 점점 좋아지는데, 넘의 집을 살아도 팔자 핀턴데.
나는 인제 남자라 하는 것이 말하자믄 싫어. 내 맘대로 … [살아]보자 하는 그 베짱 밖에 없지. 누가 저 이북서 왔다고 살자고 하는 사램들도 많앴어.
 
나 역시도 글도 모리고 아무것도 모리는게 구박만 받지 그게 한이, 원이 됐어 내가. 그런데 가가 … 몸 띠 배맀지 하는 생각하믄. 몸을 배렸다 이 말이다. 딴 사람 친구들도 다 엄마 아부지 잘 만내노이 시집가가 … 아들 딸 놓고 잘 살았는데. 말하자믄 이런데 여 시골 사람들은 개잡년이라카고 다 그렇게 다 욕하지. 하나도 좋은 소리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 그러게 … 서울에 [손주]21)애도 저거 어릴 직에나 할매, 할매 하고 이랬지마는 인제 크고 … 이거 꺼정은 알 필요가 없다 이 말이라. 할매 혼자 사는 거는 알지마는 이래 되가지고 뭐 이런 거는 말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라.
 
할마씨들[하고] 이얘기하고 우쓰개 소리하고 화투치고 하는 고거밖에 몰라 내가. … 화투도 오래도 안쳐. 한 두어 서너 시간치면 허리가 아파.
쫌 더 오래 살아야 되는 거 그거하고 … 자꾸 인자 내보다가 더 못한 사람한테 자꾸 비하는 기라 전에 부텀.
이 내 속에 들은 거 (가슴을 가리키며) 이 [아파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 청소하라거든 … 싫다 좋다 할 수 없지. [백내장 수술한] 눈 하나 이래 가래(가려) 가지고도 청소하러 댕기고, 눈이 쑥 둘러 빠지는 거 같애. 뭐 줍고 이라는데 눈에 보이지도 안하고 … 아무도 내 속을 모리는 기라. 어떻게 아픈지. … 인간이 되가지고 어디 비빌 데가 있나, 지댈 데가 있나, 내 속을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1) 차혜영, 2004, 「‘위안부’ 등록증」, 『일본군‘위안부’ 증언집6: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여성과인권, 314-318쪽.
2) 방선주, 1997, 「일본군‘위안부’의 귀환: 중간보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진상조사연구위원회 엮음,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상』, 역사비평사, 233-234쪽.
3) 황선익, 2012, 「연합군총사령부의 해외한인 귀환정책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143-144쪽.
4) 차혜영, 2004, 「김순악 면담기: ‘위안부’ 등록증」,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연구팀,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 6: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의 경험과 기억』, 여성과인권, 317쪽.
5) 한국정부에 일본군‘위안부’ 생활지원 대상자로 결정되기까지의 과정과 그것이 김순악에게 차지하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선님이 쓰고,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펴낸 증언집 136-145쪽을 함께 챙겨보기를 바란다.
6)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홈페이지 www.1945815.or.kr(2016. 10. 5. 접속).
7) 캄보디아로 끌려가 1997년에 발견된 훈 할머니가 한국국적을 되찾고, 김순악이 거주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는 광경을 목격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8) 2001년 경산시의 경상병원에서 백내장 수술을 한 것을 지칭한다.
9) 장녀인 김순악의 두 남동생을 지칭한다.
10) 김순악은 해방 후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돈을 벌기 위해 유곽을 돌아다녔다.
11) 미군 부대의 군인들이 김순악을 지칭하며 부른 말로, 영어와 일어가 혼용되어 기억되고 있다.
12) 김순악은 그때 가지고 나온 커피잔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13) 의정부 동두천에서 가진 둘째아들을 지칭한다.
14) 김순악은 50대 후반까지 서울 등지의 부잣집을 떠돌며 식모살이를 했다.
15)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금곡동.
16) 중국 내에 내몽고 자치구를 지칭한다.
17) 장가구(張家口)는 중국 허베이성 북서부에 있는 도시로 김순악은 이곳에서 위안소 생활을 했다.
18) 1인용 이부자리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
19) 흙벽돌로 차곡차곡 지은 집이여서 난방이 잘 되어 춥지 않았다는 말이다.
20) 김순악은 위안소에서 군인들을 상대하는 부분을 구술 할 때는 유난히 평소보다 말이 빨라지고, 초조하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손과 무릎에 비벼대며 산만한 행동을 보였다.
21) 큰아들의 1남 1녀인 손주들을 지칭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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